조선시대, 황희 정승은 높은 벼슬을 한 인물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장관에 해당하는 육조 판서,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좌의정,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우의정으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국무총리 급인 영의정으로 19년 동안 재임한 인물입니다.
황희 정승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깨끗하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재물에 욕심이 없고 깨끗한 선비를 뜻하는 청백리(淸白吏)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요. 방에는 멍석을 깔고 지냈고 빗물이 줄줄 새는 집에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밥상에는 된장과 보리밥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황희 정승의 모습은 깨끗한 모습과는 다릅니다. 황희 정승은 그 당시 녹봉으로 1년에 100가마의 쌀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녹봉은 국가에서 나누어 주던 재물이나 곡식을 말합니다. 놀라운 점은 쌀 100가마도 있었지만 100명이 넘는 노비가 있었다는 점이고 10만 평이 넘는 땅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1000명이 넘는 노비를 거느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세종이 황희 정승을 몇 번이나 혼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 이유는 뇌물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황희 정승은 재임 중 10여 차례 수백 명의 노비를 뇌물로 받은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실록에는 매관매직에 앞섰고 형옥을 팔았다고 하는 기록도 있고 간통을 저질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데 황희 정승은 왜 청렴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는 것일까요? 새로운 상징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특정한 소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정부패가 심했다고 합니다.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고 백성들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는 일도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렸다고 하는데요.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백성들의 불만은 많아졌습니다.
백성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선 해결책이 필요했습니다. 상징적인 의미와 적절한 스토리가 필요했는데 황희 정승을 그 주인공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랜 기간 고위직을 거쳤기 때문에 상징성을 잘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깨끗한 이미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황희 정승의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소수일 것입니다. 책을 읽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황희 정승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청백리로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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